한이경 «호텔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쓴 한이경은 20여 년간 미국, 유럽, 아랍에미리트, 일본, 말레이시아, 중국 등 전 세계의 국경을 넘나들며 호텔과 리조트 개발, 마스터플랜 수립을 해왔다. 메리어트, 힐튼, 스타우드 호텔 그룹의 여러 브랜드 호텔·리조트 개발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머무는 내내 쉬이 사라지지 않는 호텔의 마법 뒤에는 치밀하게 계산된 비밀이 숨어 있다. 수많은 이의 로망을 만들어온 한이경은 호텔이 많은 이들의 공간에 영감이 되길 바란다.
건축과 부동산 개발을 공부한 후 줄곧 호텔을 만들고 있습니다. 호텔 만드는 일이 직업이 된 건 뜻밖이라고요.
부동산 석사 과정을 공부할당시 미국의 부동산 업계는 백인 남성 중심의 사회였어요. 아시아 남자는 볼 수 없었고 여자는 더더욱 없었죠. 이력서를 무수히 보내도 취직이 안 됐어요. 하버드를 나왔는데도 시장에서 내 가치가 이정도밖에 안 되나 자괴감이 들었죠. 합격하기만 하면 죽도록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 시작하게 된 일이 리조트 개발이었어요. 그전까지는 남들과 똑같이 호텔에 대한 로망만 있었는데 콘도 호텔 개발에 손을 대기 시작하니 너무 신이 났어요. 호텔이나 리조트에 기분 나쁘려고 가는 게 아니라 다들 좋자고 가잖아요. 들뜬 기분으로 가는 긍정적인 감정이 응축된 곳이니 더 좋았어요. 점점 디테일하게 파고 들여다보니 다 똑같다고 여긴 호텔이 너무도 다르다는 걸 알게 됐죠.
호텔의 어떤 점이 그렇게도 매력적이던가요?
주거지든 사무실이든 다른 부동산 개발 상품은 지어서 팔거나 장기 렌트를 하니 개발하는 사람 입장에선 이른바 ‘손 털고 나오면’ 그다음 할 일이 없어요. 호텔은 24시간 돌아가는 곳이기 때문에 계속 들여다봐야 해요. 객실 점유율이 낮다면 어떻게 하면 손님을 더 끌 수 있을까, 만에 하나 사고가 나면 어떻게 대처를 할까, 사고 방지를 위해 디자인적으로 어떻게 풀어낼까… 굉장히 다이내믹해요. 부동산 개발 상품 중 가장 어려운 카테고리가 호텔, 요양원, 양로원, 병원이에요. 사람들이 거주하면서 24시간 사용하는 공간이란 공통점이 있죠. 업계에서는 ‘호텔을 개발할 줄 알면 거의 모든 부동산 상품을 개발할 수 있다’고 해요. 호텔은 가장 복잡한 상품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책에서 ‘호텔은 인생’이라고 했어요. 아시아 출신 여성으로서 겪는 어려움을 호텔 만드는 일로 증명했다고요.
외국에선 나로서 나를 증명해야 했어요. 당시에는 한국이 알려지지도 않아 성과로만 보여줄 수 있었어요. 백인 남성 우월 사회에서 오로지 일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한다는 것 자체가 제가 마주한 첫 번째 벽이었죠. 투자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발표도 많이 했는데 그곳 사람들만큼 고급 영어를 쓰지 못하는 것에 대한 갑갑함도 있었어요. 오히려 정면 돌파해 가장 단순한 언어로 요지를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니 굉장히 도움이 됐어요. 두 번째 벽은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며 일을 하다 보니 미국에서 쌓아놓은 경력과 평판이 리셋되는 거예요. 그러면 다시 그때부터 시작하길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오히려 단점이 장점이 되더라고요. 어떤 상황을 맞닥뜨리든 적응해야 했죠. 결국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도 어느 정도 레벨에 올라갈 수 있는 내성과 자신감이 생겼어요.
중국 최초의 웰니스 리조트 ‘상하 리트리트’는 기존에 없는 모델이었기 때문에 업계의 70~80%가 절대 ‘안 된다’고 했어요. 보이지 않는 저항감을 뚫고 오로지 나와 회장님, 임원들만 굳게 믿고 앞으로 나가야 했죠. 그때는 가족도 뒤로 제쳐놓고 일에만 매진했던 시기였어요. 막바지에는 무조건 제시간에 오픈해야 한다는 절박감 때문에 제가 아픈 줄도 몰랐어요. 현장에서 6개월 정도 돌아다니면서 정신없이 일을 했는데, 그동안 하혈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생리가 계속된다고만 생각했어요. 그러다 아버지가 아프시단 소식을 듣고 갑자기 한국에 와서는 병실 가기도 전에 병원 문앞에서 주저앉았어요. 응급실로 갔더니 의사가 미쳤냐고, 헤모글로빈 수치가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내려갔다고 하더라고요. 공사 현장이 굉장히 열악하고 스트레스가 극심했는데 그 영향이 있었나 봐요. 결국 프로젝트 끝나고 나서 자궁 적출을 했어요. 그러고 나니 이 프로젝트가 정말 내 자식인 거예요. 상하 리트리트는 아시아 베스트 웰니스 리트리트로 빼놓지 않고 선정되고 지금까지도 과분할 정도로 주목받고 있어요. 제가 한 일 중에서 가장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프로젝트죠.
호텔을 만들며 전 세계의 많은 호텔에 가봤을 텐데, 그중 ‘한이경의 베스트’를 뽑자면요?
예전에는 호텔 침대가 다 똑같았어요. 그 틀을 깬 곳이 스타우드 브랜드의 웨스틴이에요. 웨스틴 헤븐리 침대의 편안함을 아직도 잊지 못해요. 집에도 갖다놓고 지금까지 아주 잘 쓰고 있어요. 상하이 페닌술라 호텔의 애프터눈 티는 얼마나 고혹적인지 몰라요. 로비에서 차를 마시며 앉아 있으면 동양과 서양의 문물이 오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이국적인 분위기가 느껴져 시공을 초월한 느낌이 나요. 정신없이 돌아가는 메트로폴리탄인 상하이에서정신적인 오아시스를 찾고 싶을 땐 페닌술라 호텔 스파에 가 반나절 패키지를 즐기거나 하루 종일 안 나올 때도 있어요. 나만의 동굴에 있는게 가능한 곳이죠.
그리스, 로마, 중세 시대를 거쳐 싹을 틔워온 호텔의 역사는 산업혁명과 미국 고속도로 시대를 거치면서 역동적으로 발전을 거듭했다.
최초로 엘리베이터를 호텔 안에 설치한 더 홀츠 호텔과 1957년 처음 문을 연 메리어트 호텔때로는 숙소가 여행의 컨디션을 좌우할 만큼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만큼 호텔을 고를 때도 오랜 기간 고민하고 알아보는 이들이 많죠. 각자의 취향에 맞는 좋은 호텔을 잘 고르는 방법이 있나요?
안 그래도 얼마 전 아는 분이 묻더라고요. 딸이 파자마 파티를 하는데 서울에서
어느 호텔을 가야 하느냐고요. 무조건 객실 넓은 호텔에 가시라고 했죠. 이런 식으로 여행을 하는 목적에 따라 호텔 선택도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박물관이나 미술관 돌아다니는 게 목적이라면 그렇게 비싼 호텔에 안 가도 돼요. 잠자리 편하고 샤워실 깨끗하고 동선 반경에 있는 곳 중에서 선택하면 되죠. 주로 호텔에서 시간을 보낼거라면 스파, 수영장, 피트니스 시설이 얼마나 잘돼 있는지 살펴보고 객실에서 바라보는 전경이 좋은지, 야경이 좋은지, 침대가 편한지 등 호텔 내에 집중하며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아보길 권해요. 유서 깊은곳에서 역사 테마 여행을 할 땐 또 경우가 달라요. 저는 명·청 시대의 분위기를 너무나 경험해보고 싶어 중국 황산에서 1시간 떨어진 마을에 머물며 가옥을 레노베이션한 곳에서 숙박한 적이 있어요. 그럴 경우에는 침대나 숙소가 얼마나 편한지 같은 일반적 잣대는 하나도 소용없어요. 일단 왜 여행을 가고자 하는지, 여행에서 무엇을 경험하고 싶은지를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이 우선이에요.
책에서 특급 호텔일수록 컨시어지 서비스가 잘돼 있으니 활용해보라고 했어요. 호텔 서비스 중에서 잘 몰라서 활용 못하는 것들이 꽤 많은 것 같아요.
일단 컨시어지에 가서 말을 거세요. “근처 맛집 좀 추천해주세요”보다는 “저는 어디서 왔고 이곳에는 며칠 동안 머물 예정인데 로컬 음식이 먹고 싶어요. 어딜 가면 좋을까요?” 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친구처럼 나누다 보면 좋은 정보들이 나와요. “레스토랑은 여기가 좋아요”라는 기계적인 멘트 대신 “우리 직원들이 잘가는 레스토랑이 있는데 한번 가보실래요?” 같은 답변을 들을 수 있죠. 특히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컨시어지 예약을 거의 안 하는 편이에요. 숨은 장소를 추천해줄 뿐만 아니라 전화로 예약도 해주고 택시도 대절해줘요. 굉장히 편하죠.
김영하 작가는 책 «여행의 이유»에서 호텔이 좋은 이유는 근심, 걱정이 없기 때문이라고 분석했어요. 호텔 전문가로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호텔이 근심, 걱정이 없는 공간이라는 건 많은 사람이 공감해요. 그런데 왜 근심, 걱정이 없을까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않죠. 집에서 가사 도우미 서비스를 받더라도 직접 가이드를 줘야 하기 때문에 피곤한 경우가 있어요. 그런데 호텔에 딱 들어가면 아무것도 안 해도 돼요. 매뉴얼대로 알아서 해주니까 신경 쓸 일이 없는 거예요. 호텔이 안전한 공간이라는 이유도 있어요. 긴급 상황이 생기더라도 24시간 달려와줄 사람이 있고 정문에도 항상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이상한 사람들이 들어오는 걸 차단해주죠. 이런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호텔에 가면 무장해제하고 쉴 수 있어요. 또 다른 이유는 인테리어 전문가와 엔지니어들의 손길로 만들어진 공간이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흔히 로망이라고 말하는 호텔 욕실도 치밀하게 설계해놓은 것이거든요. 치열하게 살고 있는 현실과는 다른 곳으로 시공을 초월해 들어가는 경험적 측면도 한몫해요. 저조차도 집이 가장 편하지만 순간 이동을 해서 어딘가로 가고 싶을 때면 별 고민 없이 호텔에 가요.
호텔에 들어서기 전부터 체크아웃할 때까지 ‘보이지 않는 손’이 매우 치밀하게 작동하는 것 같아요. 고유의 향기도 그렇고요.
오감이 공간에서 어떻게 작동하느냐는 급이 높은 호텔이나 리조트일수록 더 세심해요. 상하 리트리트를 설계할 때는 찻잔을 입에 댔을 때의 촉감까지도 꼼꼼히 따졌어요. 객실에 플라스틱 병은 하나도 두지 않고 리조트 내에서 정수한 물을 유리병에 넣은 다음 ‘이 물은 오늘 만들어졌다’는 스티커를 붙여요. 고객들은 그런 디테일에 감동받아요.
최근 서울에는 새로 문을 연 호텔이 꽤 있어요. 국내 최신 호텔 지형도는 어떻게 재편되고 있나요?
최근 3년 반 동안 호텔들이 많이 생겨나서 몬드리안, 페어몬트 등 새로운 브랜드들이 국내에도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덕분에 소비자들의 경험의 폭이 넓어져 라이프스타일에도 큰 도움이 되죠. 좋은 걸 많이 경험해봐야 뭐가 좋은지 알 수 있으니까요. 한국은 아직까지 다른 나라에 비해 호텔 산업의 규모가 크지 않아 럭셔리 호텔의 룸 가격은 굉장히 높고 모텔은 저렴한 양극화 현상이 있었어요. 지금은 판교의 그래비티, 홍대 라이즈 호텔, 시청 앞 플라자 호텔 같은 오토그래프 라인이 생겨나는 등 등급이 다양해지고 있죠. 내년에 더 많은 브랜드가 들어올 예정이에요. 저는 한국의 럭셔리 호텔은 이제 시작이라고 얘기해요. 아직 들어올 게 많아요. 아만 그룹의 체인도 아직 한국에 없고요. 새로운 럭셔리 브랜드가 들어오면 국내 호텔 브랜드에 굉장한 위협이 될 거예요.
코로나19가 국내 호텔 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나요?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지역에 스테이가 많이 생겨난 것이 굉장히 의미 있다고 봐요. 호텔은 대기업이나 재벌같이 돈 많은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사업이지만 스테이는 개인이 할 수 있잖아요. 스테이에서 더 잘하는 건 기업들을 자극할 수도 있어요. 굉장히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글로벌 호텔 플레이어들을 자극시키고 위협하면서 에어비엔비라는 새로운 숙박업이 생긴 것처럼 개개인의 힘이 모이면 산업을 바꾸는 판도를 만들어나갈 수가 있죠. 사람들은 서울 내 호텔이 포화 상태라고 얘기하지만 저는 아직도 굉장히 할 게 많다고 보고 있어요. 스테이를 운영하던 친구들이 조금 더 경험을 쌓고 시행착오를 잘 극복해 개선하면 재미있는 숙박 형태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국내 호텔의 미래를 점쳐보자면요?
호텔의 미래를 대변하는 키워드 중 하나가 웰니스예요. 한국적인 웰니스 숙박 형태를 만들면 어마어마한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한국에는 전설이나 설화가 많잖아요. 외국 사람들은 스토리텔링에 굉장한 가치를 둬요. 스토리텔링을 디자인적으로나 운영·서비스적으로 일관되게 풀어내면 고객은 감동을 받아요. 그런 호텔에 가면 마치 딴 세계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거든요. 또 토질도 좋으니 양질의 먹거리가 나오고 건강한 요리법도 많죠.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일 수 있어요.
앞으로 꼭 하고 싶은 프로젝트가 있나요?
한국형 웰니스를 꿈꿔요. 고부가가치거든요. 객실을 파는 게 아니고 패키지를 파는 거예요. 호텔별로 객단가가 5만원, 10만원 차이밖에 안 나요. 5만원, 10만원 경쟁에서 이기자고 똑같은 종류의 객실을 만들어내기보다 그 프레임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들을 만들어내면 20만원, 30만원, 100만원의 가치가 되죠. 그러기 위해선 경험 패키지를 만들어야 해요. 스토리 텔링으로 풀어서 먹거리, 볼거리, 체험거리를 결합한다면 충분히 해외 마켓에서 승산이 있는 모델이에요. 지금 웰니스가 화두이고 수요도 많은데 아시아 지도를 펴놓고 보면 한국만 비어 있어요. 갈 데가 없어요. 의학에서 출발한 웰니스 리조트가 국내에도 몇 군데 있긴하지만 웰니스는 마음, 몸, 영성을 통합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게중심이 한쪽으로 기울면 전체의 흐름이 깨져요. 앞으로 할 일이 무척 많습니다.
Contributing Editor 김희성
Photographer 송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