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침구와 정돈된 책상과 자리. 많은 예술가에게 이곳은 영감의 세계로 향하는 문이다.
호텔리어의 고도로 매뉴얼화된 응대, 깔끔하게 정돈된 침대와 이완된 표정의 방문객들. 호텔을 찾는 이유는 복잡한 일상을 잊게 하는 평온을 선사하기 위해 그 어떤 요구도 들어줄 준비를 한 채 24시간 기민하게 움직이는 호텔리어의 친절함 때문일 수도 있겠다. 이런 환대를 뒤로하고 호텔을 떠날 무렵이면 삶을 주체적으로 살고자 하는 용기, 더 섬세해진 감각을 깨닫기도 한다. 호텔은 단순히 잘 먹고 쉬는 공간을 넘어 모든 것을 비우는 동시에 채우는 공간이 되곤 한다. 그래서일까. 많은 예술가가 호텔이란 공간을 사랑했다. 그들은 호텔에 모여 커뮤니티를 이루고 객실에서 작업 활동을 했다. 19세기 왕정이 공화정으로 바뀌면서 귀족이 붕괴되고 사교 모임 역시 궁정 밖에서 이뤄졌는데, 그때 호텔이 빛을 발했다. 중세시대부터 이어져온 여행, 순례자의 숙식 공간 인(Inn)과 달리 호텔은 호화로운 문화와 사교를 담당했다. 특히 20세기에는 민간인의 국외 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던 터라 호텔은 예술가들이 모여 살롱을 이루고 작업을 하는 아틀리에에 가까웠다.
20세기 예술가들이 커뮤니티를 이뤘던 대표적인 호텔은 미국 뉴욕 맨해튼의 첼시 호텔이다. 호텔이 위치한 맨해튼 14번가와 34번가 사이 동쪽은 본래 공장지대로 맨해튼의 임대료가 높아져 중소 갤러리들이 이사를 오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첼시 호텔은 1884년 지어진 건물로 본래 프랑스 이민자 필립 휴 버트가 뉴욕시 최초의 협동조합 아파트로 기획했다. 그는 부유한 거주자를 위한 12개의 넓은 방과 예술가나 학자, 젊은이를 위한 80개의 방으로 구성했는데 그중 15개를 예술가의 스튜디오로 배정했다. 다양한 사람이 모여 교류하고 집안일을 공유하면서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고, 이를 통해 첼시 호텔이 예술가들의 커뮤니티가 되는 발판을 만든 것이다. 아파트는 이후 호텔이 되면서 250개의 객실로 바뀌었고 1970년대 스탠리 바드가 경영을 맡으면서 예술가들은 더욱더 첼시 호텔로 모여들었다. 형편이 어려운 아티스트들에게는 임대료 대신 작품을 받기도 하고 벨보이로 고용해 월급을 주기도 했다.
“오래 살아온 집에는 상처가 있다. 지워지지 않는 벽지의 얼룩처럼 온갖 기억들이 집 여기저기에 들러붙어 있다. 호텔에선 언제나 삶이 리셋되는 기분이다. 처음 들어설 때도 그렇고, 다음 날 외출하고 돌아올 때도 그렇다. 호텔은 집요하게 기억을 지운다. 이전 투숙객의 기억은 물론이거니와 내가 전날 남겼던 생활의 흔적도 지워지거나 살짝 달라져 있다.”
–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 중에서
초기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예술가들이 삶의 터전을 찾아 호텔에 왔다면 이후에는 호텔이 구축한 예술가 커뮤니티 소문을 듣고 더 많은 예술가들이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소설가 마크 트웨인부터 화가 잭슨 폴록 · 앤디 워홀, 뮤지션 밥 딜런과 지미 핸드릭스·짐 모리슨·패티 스미스, 영화 감독 스탠리 큐브릭 등 셀 수 없이 많은 유명 아티스트가 오랜 시간 첼시 호텔에 머물렀다. 그만큼 호텔에 쌓인 스토리도 대단하다. 호텔 통로에서 아서 밀러와 마릴린 먼로가 이별한 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고, 레오너드 코헨의 ‘Chelsea Hotel #2’처럼 뮤지션들이 첼시 호텔에서 영감을 받아쓴 곡도 많다. SF 작가 아서 클라크는 이곳에서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을 집필하기도 했다. 소유권 분쟁 문제로 2011년부터는 호텔 운영이 중단됐지만 관광객들은 여전히 호텔 앞을 찾아 사진을 찍는다. 또 옥션을 통해 아티스트들이 장기 투숙했던 객실 방문이 고가에 거래되기도 하는데, 이곳을 사랑했던 아티스트만큼이나 대중에게도 애틋한 공간이 되었다.
할리우드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마릴린 먼로에게도 호텔은 특별한 공간이다. 어려서 어머니가 정신병원에 수용된 뒤 외톨이로 자랐고 고아원과 길거리를 전전하며 부유하듯 살아온 그는 배우로 성공한 이후에도 불안한 심리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때마다 호텔은 그에게 새로 시작하는 용기와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안정감을 주는 공간이었다. 그는 여러 호텔을 이사하듯 살았는데 마릴린 먼로로 인해 유명세를 얻은 호텔도 적지 않다.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River of no return)>의 촬영을 위해 마릴린 먼로가 잠시 머문 캐나다의 밴프 스프링스, 그의 출연작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의 배경이 된 호텔 캘리포니아의 호텔 델 코로나도도 유명해졌다. 두 호텔 모두 여전히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마릴린 먼로는 1955년 20세기폭스와의 계약을 포기하고 할리우드를 떠날 때도 뉴욕의 앰배서더 호텔 스위트룸으로 이사했다.
하지만 마릴린 먼로에게 안식처와 같은 호텔은 따로 있다. 미국 LA의 할리우드 루즈벨트 호텔이다. 개장과 함께 1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릴 만큼 여러 배우들이 사랑한 이곳은 마릴린 먼로 외에도 찰리 채플린, 몽고메리 클리프트, 클라크 게이블 등 할리우드 배우들이 장기 숙박하며 객실을 집처럼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마릴린 먼로는 1950년대 이후 배우로서 성공은 거두었지만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며 정신이 피폐한 상태에 이르렀는데, 그때마다 그는 루즈벨트호텔 322호에 장기 투숙하며 제2의 집으로 여겼다. 호텔 역시 먼로를 위해 항상 방을 비워두었다. 그는 외부와 차단된 방의 구조와 우아한 인테리어를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마릴린 먼로가 휴식을 찾아 여러 호텔을 돌아다녔다면 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은 파리 방돔 광장의 리츠 호텔 302호 스위트 룸에 37년간 머물다 눈을 감았다. 리츠 호텔은 영국의 다이애나 비가 생전에 머물렀을 만큼 프랑스의 고급 호텔로 꼽히는 곳. 그는 그곳에서 연인이자 나치 장교였던 한스 권터 폰 딘클라게와 함께 동거했고, 매체와의 인터뷰를 진행하며 샤넬의 시그너처 백 2.55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코코 샤넬에게 리츠 호텔은 삶의 배경과도 같았다. 이후 호텔은 150만 달러(18억원)가량의 거금을 들여 대대적으로 정비했는데, 코코 샤넬이 머물렀던 302호를 샤넬 스위트로 리모델링했다.
잭슨 폴록, 마크 트웨인, 코코 샤넬 이외에도 화가 클로드 모네,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이 호텔에 머물며 개인 작업을 했다. 가족, 인종, 전쟁,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 꾸준히 목소리를 높여온 시인이자 비평가 도로시 파커 역시 뉴욕의 알곤퀸 호텔에 머물며 논평과 시를 썼다. 그는 알곤퀸 호텔의 원탁 테이블에 둘러앉아 점심을 먹으며 시사와 문학에 대해 토론하는 알콘퀸 라운드 테이블의 창립 멤버이기도 하다. 잡지 <뉴요커>의 창립자 해롤드 로스, 영화배우 로버트 벤츨리, 극작가 조지 S. 코프만과 함께 모임을 이끌었다. 해롤드 로스는 이 자리를 통해 <뉴요커>를 창간할 수 있었고, <뉴요커> 본사는 여전히 알곤퀸 호텔 맞은편에 자리한다. 도로시 파커는 결혼과 동시에 할리우드로 본거지를 옮겼지만 이혼 후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다. 줄곧 호텔에서 글을 쓰던 그는 1967년 뉴욕의 어느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예술가들은 왜 이토록 호텔에서의 시간을 사랑했을까. 어느 날은 머물 곳이 마땅치 않아, 또 어느 날은 예술가 친구의 손에 이끌렸을 것이다. 안전하고 정돈된 공간에서의 일상에는 생계에 대한 근심이나 잡념이 놓일 자리가 없다. 특별한 파티와 거대한 만찬보다는 현실의 고민을 잠시 접고 작업에 몰두하며 그들만의 세계에 흠뻑 취할 수 있었던 곳, 어쩌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마주할 공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호텔을 찾는 우리의 마음과도 비슷하다. 선베드에 누워 책을 읽고 종일 침대에서 넷플릭스를 보는 일. 신선한 과일과 채소의 아삭한 식감을 오롯이 느끼는 것만으로도 삶의 잡념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것처럼.
Contributing Editor 유승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