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음악평론가 김윤하다. 매년 새해가 돌아오는 만큼 또 매년 새로운 뮤지션이 찾아온다는 게 신기하다. 시끄러운 만큼 척박하기로 유명한 한국 대중음악계를 뚫고, 올해도 새롭고 잘하는 뮤지션들이 떠오르고 있다. 쟁쟁한 이력을 자랑하는 실력파들이 새롭게 결성한 그룹부터 데뷔한 지 1년도 안 된 신인, 활동 영역을 옮겨 새출발을 알린 이와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훨씬 큰 사랑을 받는 이름까지. 2024년을 누구보다 뜨겁고 밝게 보낼 채비를 마친 신예 10팀을 소개한다.
힙노시스 테라피
HYPNOSIS THERAPY
팀 이름을 말하면 다시 한번 말해 달라는 반응이 제일 먼저 돌아온다. 잠깐의 실망 뒤 이 팀이 <쇼 미 더 머니 8>의 래퍼 짱유와 히피는집시였다의 프로듀서 제이플로우(Jflow)가 결성한 팀이라는 설명을 붙이면 장르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은 눈빛이 조금 달라진다. 두 사람이 함께했던 와비사비룸을 정말 좋아했다며 어필하는 사람도 간혹 등장한다. 그리고 마지막. 지금까지 정규만 두 장을 낸 힙노시스 테라피의 음악을 들려주면 십중팔구 말한다. 이거 ‘물건’이라고. 힙노시스 테라피가 데뷔한 2022년 10월 이래 줄곧 반복된 반응이었다.
힙노시스 테라피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이런 생각이 든다. 두 사람 모두 힙합을 베이스캠프로 살아왔지만, 사실은 각자의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파장을 정제해 담아낼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 테크노, 정글, 하우스, 무엇이든 섣불리 장르로 규정했다가는 당장이라도 스피커와 이어폰을 찢고 뛰쳐나올 것 같은 강렬한 힘이 이들 음악에는 있다. 형형하고 건강한 광기(狂氣). 제대로 한 번 미쳐보는 것조차 눈치 보게 되는 세상에 이만한 음악 치료가 또 없다.
웨이브 투 어스
wave to earth
‘이제 케이팝에서 해외는 상수(常數)’라는 말이 나온 지도 꽤 됐다. 과연, 2010년대 후반 이후 데뷔한 케이팝 가수 가운데 해외를 의식하지 않은 팀은 단언컨대 한 팀도 없다. 이러한 경향은 당연하게도 케이팝뿐만이 아닌 다양한 장르에 영향을 끼쳤다. 해외에서 이미 너른 의미의 ‘케이팝’으로 불리고 있는 한국 대중음악 전반이 이미 그렇게 체질 변화를 마친 참이기도 하다. 밴드 웨이브투어스는 그렇게 ‘아이돌형’ 케이팝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들에게 여러 의미로 시야를 넓혀보라며 권할 만한 대표적인 이름이다.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 밴드는 2024년 3월 기준 스포티파이 월별 청취자 수 660만 명을 웃도는 슈퍼 밴드 가운데 하나다. 앨범 하나에 수백 만 장이 넘는 판매량을 보유한 그룹 NCT DREAM(422만 명)이나 5세대를 대표하는 보이 그룹 라이즈(RIIZE)(325만 명) 등 웬만한 케이팝 아이돌 월별 청취자 수를 훌쩍 웃도는 수치다. 고교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김다니엘, 차순종, 신동규 세 사람이 마음을 모아 2019년 데뷔한 이들은 국내에서는 아도이(ADOY)로 대표되는 부드럽고 낭만적인 밴드 사운드로 전 세계 팬들을 서서히 사로잡았다. 지난해 북미 18개 도시에서 총 20회 공연을 돌며 2만 2,000석 전석을 매진시키기도 했다. 이들은 올 상반기 유라시아 투어를 마친 뒤 다시 한번 미국 투어에 도전할 예정이다. 물론 지난해보다 훨씬 큰 규모다.
키스 오브 라이프
KISS OF LIFE
일 년에도 수십 수백의 별들이 뜨고 지는 케이팝 신은 화려한 만큼 냉혹하다. 몇 년을 준비해 나와도 제대로 된 스포트라이트 한 번 받기 힘든 생태계 속에서, 2023년 키스 오브 라이프가 피어났다. 이들의 데뷔를 둘러싼 요소들을 생각해 보면 키스 오브 라이프에게 주어지는 지금의 주목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해도 좋을 정도다. 이들은 지난 10여 년간 그 어느 때보다 화제의 신인 보이 그룹 데뷔가 많았다던 2023년에 등장했다. 팬데믹을 통과하는 동안 한 없이 높아진 케이팝 팬들의 눈은 소위 ‘돈 들인 냄새’가 나는 콘텐츠를 기준으로 맞춰져 버렸다.
대형 기획사 소속도 아니고, 특별한 팬덤을 가진 멤버도 없는 상황에서 키스 오브 라이프가 택한 길은 개성과 실력,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데뷔작 [KISS OF LIFE]에 전 멤버 솔로곡을 과감하게 담아낸 이들은, 곧이어 발매된 두 번째 EP [Born to be XX]를 통해 이들이 지향하는 음악과 콘셉트를 세상에 보다 명확히 알렸다. 음악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한 ‘한국대중음악상’도 이들을 일찌감치 알아보며 ‘올해의 신인’ 타이틀을 붙였다. 2000년대를 전후로 한 감각적인 힙합과 R&B 위로 쥴리, 나띠, 벨, 하늘 개성 넘치는 네 멤버가 각자의 춤을 멋들어지게 춘다.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비상(飛上)이다.
데이식스
DAY6
‘군대’와 ‘공백기’를 합친 단어 ‘군백기’는 최근 케이팝신에 등장한 신조어다. 군 입대로 생긴 공백기를 뜻하는 이 단어가 이제야 유행을 타게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특히 아이돌의 경우, 스무 살 전후의 나이로 데뷔하는 업계 특성상 입대가 가능한 마지노선인 20대 후반이 되면 이미 소속 그룹 자체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한국에 아이돌이라는 직업군이 생긴 이래, 아이돌은 그 어느 때보다 장수하는 중이다. 덕분에 군백기를 무사히 마무리하고 활동 제2막을 여는 그룹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데이식스도 그런 그룹 가운데 하나다. 다만 이들은 군백기를 그저 견디지 않고, 그룹 내외적으로 누구보다 충실한 군백기를 보낸 것으로 유명하다. 2015년 데뷔해 올해로 활동 9년 차에 들어선 이들은 육군, 군악대, 해군, 카투사로 각자 충실히 주어진 군복무를 이행했다. 그동안 데이식스가 사회에 남기고 간 노래들이 흥했다. ‘예뻤어’,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같은 노래가 때마다 차트를 역주행 했다. 다름 아닌 ‘좋은 음악’의 힘이었다. 모든 멤버가 사회로 복귀해 발표하는 첫 앨범의 제목은 [FOUREVER], 타이틀 곡은 ‘Welcome to the Show’다. 데이식스의 두 번째 챕터가 이제 막 시작되었다.
비비
BIBI
아무리 한 치 앞도 예상하기 힘든 음악계라지만, 비비가 상반기 최고의 화제가 될 거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2024년 새해를 맞이해 비비가 발표한 싱글 ‘밤양갱’의 시작은 조용했다. 앨범 수록곡도 아니었고, 지금까지 비비가 자주 불러온 R&B나 팝을 기반으로 한 스타일도 아니었다. 발매날짜도 밸런타인데이 전날인 2월 13일. 남들 다 초콜릿 타령할 때 밤양갱이라니 귀여운 발상이구나 정도로 그칠 줄 알았던 노래는 큰 이변이 없는 한 2024년을 대표하는 곡이 될 예정이다.
그럼에도 다시, 비비에 주목한다. ‘밤양갱’은 앞서 말한 것처럼 비비답지 않은 노래이자 그렇기 때문에 비비라는 보컬리스트가 지금까지 보여주지 못한 장점을 자신감 있게 드러낼 수 있는 노래다. 싱어송라이터 장기하가 만든 노래는 이별하는 순간 문득 떠오른, 사랑하는 사람과 나눠 먹은 작고 단 밤양갱을 그린다. 그 짧은 순간의 상념에 삼라만상을 담아 왈츠를 추듯 천연덕스럽게 노래하는 보컬리스트 비비의 재능은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한국 대중가요의 ‘선을 넘는’ 여러 시도를 다른 의미로 한 번 더 뛰어넘는다. 나른한 리듬에 기대 ‘저년 저거 이상하다’며 부르던 데뷔곡 ‘비누’가 이상하게 겹친다. 평범한 곡을 도무지 평범하게 부르지 않는 비비의 재능이 또다시 꽃피웠다.
크리스탈
KRYSTAL
크리스탈은 한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케이팝 사상 가장 이상하고 그만큼 매력적이었던 그룹 f(x)의 멤버로 활동하던 그때, 크리스탈을 동경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말이 많은 편도 아니었고, 표정 변화가 격렬한 편도 아니었다. 물론 열심히 노래하고 춤추며 뚜렷한 제 몫을 했지만, 종종 크리스탈 주변의 공기와 시간만 멈춰져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가만히만 있어도 빛이 나는, 사람들의 눈과 귀를 끄는 마법이 그의 주변에만 걸려 있는 것 같았다.
그룹 활동과 동시에 배우로도 활약했던 크리스탈은 f(x)가 그룹을 마무리하고, 동고동락하던 SM엔터테인먼트까지 떠나면서 본격적인 배우 활동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드라마 ‘써치’, ‘경찰 수업’, ‘크레이지 러브’, 영화 ‘새콤달콤’과 ‘거미집’ 등 필모그래피가 쌓여갈수록 그가 음악계로 복귀하리란 기대도 점차 희미해져 갔다. 그러던 2024년, 크리스탈은 자신의 공식 사운드클라우드 계정을 통해 새 커버 곡 ‘I’m Coming Back’을 올리며 자신이 음악 레이블 BANA에 영입되었음을 알렸다. 래퍼 빈지노와 프로듀서 250, XXX의 김심야와 FRNK,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조웅 등이 소속된 음악 제대로 하는 근성 있는 레이블과 크리스탈의 만남. 2024년의 크리스탈이 기대되지 않을 수가 없다.
저드
JERD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렇듯 대중 음악계에도 트렌드라는 것이 있다. 음악 차트 상위권이나 지금 제일 잘 팔리는 상품과는 다른 의미의, 지금 제일 뜨거운 곳에 치는 새로운 파도. 한국 대중음악계를 기준으로 최근 몇 년간 그렇게 뜨거운 물결 속에서 좋은 음악가를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을 찾는다면 다름 아닌 R&B 신이었다. 같은 흑인 음악을 뿌리로 이제는 가요계에도 일상화된 힙합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주목 받고 있지만, 주목만 했다 하면 줄줄이 사탕처럼 재능 넘치는 신예들이 딸려 나오는 보석 밭 같은 존재가 바로 그곳이었다.
싱어송라이터 저드는 그 번쩍이는 보석 밭에서 누구보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누구보다 깊이 있게 풀어낼 줄 아는 재주를 가진 인물이었다. 2021년 발표한 [A.M.P.]로 한 번 맛을 보여준 그는 2023년 발표한 두 번째 정규앨범 [BOMM]을 통해 동시대를 대표하는 젊은 싱어송라이터이자 프로듀서로서의 재능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봄’이라는 앨범 타이틀과 첫 곡 ‘ARIA’가 주는 묵직한 감상 위로 저드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불안한 일상의 조각들이 뾰족하게 때로는 팝적으로 풀려나간다. 청춘의 치기와 황혼의 사색, 대중과 평단 등 얼핏 상반되어 보이는 거의 모든 것들이 하나의 통로로 수렴된다. 뛰어난 이야기꾼이자 프로듀서의 탄생이다.
제이클레프
Jclef
한국 대중음악을 주의 깊게 살피는 사람 가운데 제이클레프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2018년 발표한 첫 정규 앨범 [flaw, flaw]를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랬다. ‘지구 멸망 한 시간 전’ 같은 제목을 상상하고 완성도 있게 풀어내기까지 하는 사람이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듬해 이 땅의 모든 엄마와 딸을 울린 ‘mama, see’까지 듣고는 지울 수 없는 확신이 들었다. 음악성과 대중성이라는, 영원히 가까워질 수 없을 것 같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새로운 싱어송라이터가 등장했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아쉬움은 그 뒤였다. ‘mama, see’ 이후, 제이클레프는 뚜렷한 활동을 보여주지 않은 채 잠정적인 휴식기에 들어갔다. 2020년부터 시작된 코로나의 영향도 있었고, 음악적인 방황도 물론 있었다. 그런 인고의 시간 끝에 2023년, 제이클레프가 4년 반 만의 새 앨범 [O, Pruned!]로 돌아왔다. 제이클레프의 반짝임을 감지할 수 있었던 대체할 수 없는 서정을 바탕으로, 이전과는 사뭇 달라진 음악이 귓가에 맴돌았다. 흑인음악이나 R&B에 확실한 방점을 찍을 수 있던 음악은 팝으로 완전히 방향을 틀었다. 이건 앨범의 전반적인 방향과 편곡에 큰 힘이 된 제이클레프의 음악 동료 gimjonny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알을 깨고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된 제이클레프의 성장이기도 했다. 가지가 잘린 아픔과 상처 속에서 새로 피워낸 함께하는 노래. 그의 ‘다음 음악’을 5년보다는 짧은 시간 안에 만나보고 싶다.
잔물결
나를 바라봐 달라는, 내가 이렇게 대단하다는 악다구니로 온통 가득 찬 세상에서 잔물결이라니. 이름을 처음 듣고 소박해도 너무 소박한 야망 아닌가 싶었다. 현우(기타, 작곡), 호티(드럼), 단도(보컬, 베이스, 작사) 세 사람이 모인 밴드는 로컬 밴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가운데에서도 다소 소외되어 있던 지역, 창원 출신이다.
활동하던 밴드를 그만두고 한 동안 의욕을 잃었던 현우가 오랜 음악 친구 호티와 수소문 끝에 섭외한 보컬 단도를 모아 결성한 밴드는 잔물결이라는 이름 그대로의 음악을 한다. 이들이 처음 도원결의를 한 2022년 초여름 메타세콰이어길 어딘가에서 기필코 빛나고 있었을 것 같은 윤슬의 반짝임이 음악 내내 어린다. 기타 팝이나 인디 팝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돌릴 수 밖에 없는 징글쟁글한 리듬과 멜로디의 손을 잡고 혼잣말 같기도, 잠꼬대 같기도 한 말들이 조심스럽게 스텝을 맞춘다. 금방이라도 초록 물이 떨어질 것처럼 촉촉한 사운드와 덤덤한 단도의 목소리의 조화가 무척 특별한 감상을 전한다. 우리 삶의 특별한 순간에 울렸던, 찰랑이는 마음과 닮은 그런 기분 말이다.
안신애
신들린 것처럼 노래 잘하는 보컬리스트에 대한 지지는 시대를 초월해 꾸준히 존재해 왔다. 노래하는 게 직업인 사람에게 노래 잘한다는 말은 칭찬인지 하나 마나 한 소린지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동안, 안신애는 언제나 노래하고 있었다. 안신애의 데뷔는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레트로 걸그룹’이라는 수식어로 미디어에 자주 오르내렸던 보컬 그룹 바버렛츠(The Barberettes)가 그의 시작점이었다. 레트로라는 콘셉트에 걸맞게 ‘노란샤쓰의 사나이’, ‘Mr. Sandman’ 같은 6, 70년대 인기 곡을 기가 막히게 불러 젖히며 주목받았던 그 그룹이 맞다.
이제는 지난 경력임에도 안신애를 소개하며 바버렛츠 이야기를 한 번 더 꺼내는 건, 어떤 노래든 기가 막히게 부르던 품새는 그대로, R&B와 쏘울에 좀 더 방점을 찍은 안신애의 지금을 보다 효율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다. 정식 솔로 명의로 발표한 곡은 아직 몇 곡의 OST와 싱글 2곡 밖에 되지 않지만, 그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종종 올라오는 가벼운 커버 영상을 정주행 하는 것만으로 그가 얼마나 큰 가능성을 품고 있는 보컬리스트인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제 안신애에게 필요한 건 그의 목소리를 담을 더 많은 노래와 그를 더 많은 이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기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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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하
대중음악평론가. 케이팝에서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을 다룹니다. 어떻게 음악을 더 선명한 말과 글로 풀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출처 : https://the-edit.co.kr/65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