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후명 작가의 강릉

by Styler USA

그에게 ‘소설적 자아의 시작점’이자 ‘모든 작품의 원천’은 강릉이다.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는 길목에 조용한 작업실을 준비하는
윤후명 작가를 만나 강릉과 얽힌 그의 인생을 회상해보았다.

“네가 가장 잘 아는 이야기를 써라. 여러 번 실패를 거듭한 끝이었습니다. 소설이라는 틀에 얽매여 그야말로 어거지로 ‘소설’을 만들려고 한 기본부터 잘못되어 있는 게 아닐까. ‘소설’이 아니라 ‘내 소설’을 써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번쩍, 하는 섬광이 눈에 어렸습니다. 나는 내 고향의 이야기를 더듬기 시작했습니다. 태어남이 있었고, 전쟁이 있었고, 만남과 헤어짐이 있었습니다. 죽음이 있었습니다. 사랑과 미움이 있었고, 오랜 상처가 있었습니다. 과거와 현재, 시간과 공간이 얽혔습니다. 치유와 화해가 있었는가. 고향의 큰 산과 큰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윤후명 작가의 소설 전집 1권 《강릉》에 적은 ‘작가의 말’에는 강릉에 대한 마음과 소설가로서의 시작이 담겨 있다. 그에게 강릉은 애초부터 좋고 싫음으로 분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숱한 감정과 이미지와 이야기가 여러 갈래로 확장되는 출발점에 가깝다. 그저 살아남아야 했던 시간과 뜨거운 존재와 그리워하면서도 차마 향하지 못한 발길과 숱한 망설임 같은 것들이 그곳에 머물러 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느낀 온기와 기억을 더듬어 옛집을 찾는 헤맴, 그곳에서 다시 문장을 가르치고 문학을 이야기하는 기꺼운 시간도 함께다. 윤후명 작가는 긴 세월 동안 시와 소설을 쓰며 살았다. 고향 강릉이 그의 문장에 녹아든 시간도 비슷하다. 그는 다시 강릉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는 중이다. 내내 머물지는 못하더라도 문득 찾아가 시 한 편 쓰겠다는 마음이다.

기억의 처음, 강릉과 어머니
갓난아기가 첫울음을 운 때는 1946년 1월이었다. 열아홉 살의 어머니는 아들을 품으로 바짝 당겨 젖을 물리고 탄생을 목도하는 별들이 저마다의 음악 소리를 내던 날이다. 가장 오래된 기억은 남대천 옆 임당동성당 부근에 자리한 집이다. 내리는 눈이 키보다 높게 쌓이면 굴을 파서 지나다니거나 집과 집을 연결하는 줄을 매어 눈을 헤치고 나아가던 재미있는 기억이 스민 곳이다. 그러나 시절은 결코 안온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는 막을 내렸으나 길고 혹독한 전쟁이 다가오고 있었고 모두가 가난을 달고 살았다. 전쟁을 겪을 때엔 밤에도 불을 밝히지 못했고 연기가 나서 사람이 있다는 것이 알려질까 두려워 군불도 뗄 수 없었다. 서슬 퍼런 순간과 처참한 광경들이 펼쳐지는 날이 이어졌다. 그리고 강릉에 대한 기억 중심에는 언제나 어머니가 있다.

“어머니가 나 때문에 애를 많이 먹었죠. 열아홉 살 어린 나이에 나를 낳았고 남편을 잃고 전쟁을 겪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자식과 함께 살아남으려고 임당동에서 담배 장사를 하셨어요. 전쟁이 터졌는데 내가 홍역에 걸려 피란도 가지 못했고 끙끙 앓는 아들을 살피려고 불을 밝혔다가 잡혀가기도 했어요. 어린 여인이 조그만 자식을 데리고 어렵게 살아가는 사연을 알고 나서야 어머니를 풀어주었죠. 운 좋게 살아난 거죠. 무슨 정해진 법을 따르는 것도 아니고 죽이면 죽고, 살려주면 살고 그랬던 시절이에요. 수챗구멍에 걸리는 막걸리 지게미를 먹기도 했어요. 젊은 세대는 아예 모르는 이야기죠. 강릉에 가면 오리바위, 십리바위가 있어요. 그 앞에다 내 어머니의 뼈를 뿌렸어요. 그랬어요.”
생의 기억은 행복이나 불행 중 한쪽으로 기우는 법이 없다. 어머니에 관한 따스하고 설레는 추억도 있다. 강릉의 대표적인 축제인 단오제다. 그가 글에 자주 인용한 설화 ‘강릉 호랑이와 처녀’는 어느 날 처녀를 물어가 바위 위에 머리만 남겨둔 호랑이가 해마다 나무로 변신해 처가로 내려온다는 내용인데, 이것을 기리는 것이 강릉 단오제의 뿌리다. 작가는 단오제를 세계에서 유일한 자생적 축제라고 여러 번 강조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단오제가 열리면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집에서 나와 남대천에 놓인 돌다리를 건너던 기억은 오늘처럼 생생하고, 단 하나의 그네를 타기 위해 여인들이 줄을 선 그곳에는 어김없이 어머니가 있었다.
많은 기억이 희미해도 그네를 타고 누가 더 높이 올라가는지 힘껏 겨루는 축제를 찾아가던 과정과 그곳에 있던 어머니의 모습만은 또렷하다.

전쟁 때문에 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소년은 동네를 헤매고 다녔다. 그때의 강릉은 지금과 달리 하나의 읍에 지나지 않았고 큰 길 하나를 따라 이쪽에서 저쪽까지가 전부였다. 그의 첫 단편 <높새의 집>에는 어린 시절 유일한 친구이자 옆집에 살았던 세화가 등장한다. 홍역에 걸려 집에 머물러야 했던 소년과 다른 이유로 집을 떠나지 못한 세화. 열이 잠시 내린 어느 날 소년과 세화는 함께 집을 빠져나와 신작로로 향한다. 어른 팔뚝만 한 찰옥수수를 가지고 나온 여인들이 모두 사라진 장터와 꽁치를 구워 팔던 풍경이 사라진 거리, 세화가 갖고 싶어 하는 인형이 있던 가게를 지나 성당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목격한 것은 쓰러진 채 빗물에 얼룩진 석고상이었다. 언젠가처럼 각자의 소원을 비는 장면과 서로에 대한 소중함을 쉽게 고백하지 못했던 순수의 시절이 소설 속에 적혔다. 윤후명 작가는 세화를 자신의 첫 소설 <산역>에서 ‘선녀’로 변형한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기도 했는데, 비극적인 시대에 벌어진 사랑 이야기 속 멀리 바다가 보이는 산꼭대기를 돌며 한 사람의 영원한 자리를 찾는 여인이다.

“여덟 살에 강릉을 떠나 지방을 돌게 됐죠. 그땐 다들 그랬어요. 먹고살기 위해 피란을 가고 지역을 떠돌며 유목민처럼 살았어요. 오랫동안 강릉에 가지 않으려고 했어요. 내가 뭐 가진 게 있나, 자랑할 게 있나. 그런 게 전혀 없단 말이에요. 더구나 전쟁을 겪은 곳이잖아요. 지금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고향으로 향하기는 쉽지 않았어요. 고등학생 때 서울로 왔고, 스물한 살에 시인으로 등단하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야 강릉을 찾아갔죠. 기억을 더듬어 내가 살았던 마을과 내가 살던 집을 찾아 서성댔어요.”
성인이 될 때까지 느낀 고향에 대한 거리감과 헤맴의 고백은 소설 <바위 위의 발자국>과 닿아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은 25년 만에 고향을 찾았고 변해버린 도시 앞에서 혼돈에 빠진다. 어린 시절 귤을 건지던 바다가 어디였는지, 그 가운데 커다란 발자국이 찍힌 바위가 어디에 있는지 찾지 못한 채 무작정 택시를 타고 거리를 헤맨다. 두 시간 뒤에 만나기로 한 여인을 다방에 둔 채 길을 잃은 남자의 모습은 어떤 시절의 작가를 닮아 있다. ‘내가 머릿속에 그려놓고 있던 지도는 허구의 지도였음’을 깨닫는 순간이 그에게도 분명 있었음을 안다.

작가 윤후명의 강릉은 뜨겁고 시리다. 기억하는 고향 강릉을 시와 소설로 기록하는 일은 자신의 존재와 뿌리를 끊임없이 새기는 작업이기도 하다.
시작과 마지막에 놓인 어떤 것, 그에게 강릉은 공간을 넘어서는 의미다.

행간마다 새겨진 또 하나의 세계, 강릉과 소설
그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1967년 신춘문예로 등단하기 전 열일곱 살에 성균관대학교 백일장에서 시 부문 장원을 차지했다. 그때 스스로에게 평생 글을 쓰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그게 뭐라고 여태까지, 그깟 약속이 뭐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글을 쓰는 삶을 후회한 적 없다고 단언했다. 마치 쓰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단 하나의 약속을 신념처럼 마음에 품고 살았다. 시로 등단한 지 12년 만에 작가는 단편 <산역>으로 소설가가 되었다. 시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인간처럼 정화되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시작한 소설이다. 어떻게든 소설을 쓰기 위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심정이 되길 여러 번, 마침내 찾아낸 것이 고향 강릉이었다. 자신만의 소설을 쓰기 위해서 ‘나의 이야기’를 적기 시작했고 고향 강릉은 소설의 바탕이 될 윤후명만의 배경이었던 것이다. 소설로 신춘문예에 당선된 후 심사를 맡았던 이어령 선생은 그에게 ‘딱 하나 정해서 쓰라’고 했다. 자신은 시도 쓰고 소설도 쓰고 수필도 썼지만, 그래서 다 잘 안 됐다고. 윤후명에게 자신처럼 되지 말고 한 가지를 쓰길 권한 것이다. 모두가 존경하는 인물이 젊은 작가를 위해 속내를 드러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소설로 등단한 후 윤후명 작가는 ‘소설을 쓰는 시인’이라고 자주 불렸다. 시의 깊이와 감성을 담은 문장들이 소설 속에 자리해서다. 3인칭 소설이 대부분이던 시절에 ‘나’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1인칭 소설은 신선하게 다가왔고 개인의 기억과 경험이 응축된 그의 소설은 현실보다 더 진실했다. 20년간 소설에 몰두한 작가는 《둔황의 사랑》 《원숭이는 없다》 《여우 사냥》 《새의 말을 듣다》 《협궤열차》 등 수많은 작품을 완성했고 1977년 첫 시집 《명궁》을 시작으로 《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 《쇠물닭의 책》 《강릉 별빛》까지 네 권의 시집도 내놨다. 붉고 흰 엉겅퀴 그림들을 그려 개인전도 열었으니 그는 단 한 번도 쓰고 그리는 삶을 멈춘 적이 없는 셈이다. 등단 50주년을 앞두고 소설가로서의 궤적을 그러모으기 위해 2014년부터 준비한 소설 전집 프로젝트는 2016년 《강릉》을 시작으로 2017년 열두 번째 《삼국유사 읽는 호텔》로 완성됐다. “길 위에 선 자의 기록이자 심미안을 가진 작가의 초상화다. 강릉을 출발해 고비를 지나 알타이를 넘어 다시 마침내 나로 회귀하는 방황과 탐구의 여정이다”라는 소설 전집에 대한 설명처럼 작가의 삶과 작품 세계를 일갈하는 기록. 소설 전집 1권인 《강릉》 속에는 당시 최신작인 <눈 속의 시인 학교>와 소설가로서의 첫 작품인 <산역>이 맨 앞과 뒤를 단단히 지켰다. ‘나는 이렇게 시작하여 여기에 이르렀다’는 한마디를 그렇게 아우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기 자신을 알고 싶다면 소설을 쓰라고 권한다. 소설은 ‘이렇게 써야 한다’는 특정한 방법이 없다는 것. 한 유명한 인물이 소설 쓰기의 방법을 ‘시작한다, 계속한다, 끝낸다’로 정리했다며 이처럼 쉬운 일이 어디 있겠나 덧붙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소설에 나를 넣으면 비로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고 했다. 글 속에 깃든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으니 틀과 형식에 갇히지 말고 마음껏 쓰라고 강조했다. 50년 넘게 쓰는 삶에 대한 소회를 물었을 때 그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쓰고 싶다고 했던 묘비명인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는 말이 생각난다고 했다. “적어도 윤후명은 게으르지 않았어요. 최선을 다해 썼어요.” 고백 같은 회상 끝에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50년간 쓴 소설을 그러모은 소설 전집 1권 《강릉》 속에는 대관령에서 펼쳐지는 강릉 풍경과 바다를 향한 방파제, 작가의 유년과 강릉을 다시 찾은 감회가 책장마다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 시 한 편을 쓰고 싶은 곳, 강릉과 시
고향 강릉을 자주 찾아가며 윤후명 작가는 자신의 근거를 찾기 위해 애썼다. 호적조차 제대로 없던 시절에 살았기에 기억을 넘어선 공식적인 증명 같은 것이 절실했다. 그는 어머니가 다닌 임당동성당으로 찾아가 자신이 태어난 해에 영아세례를 받은 기록을 볼 수 있는지 물었고 ‘절대로 안 되는 일’이라는 답변을 들었다. 어떻게든 자신이 강릉에 실재했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은 진심이 통했는지 후에 확인 작업이 가능해졌고, 전쟁 때 땅에 묻고 갔다는 교적부에는 ‘임당동성당 271번 베드로’가 분명하게 적혀 있었다. 1946년 1월에 기재된 유일한 사내아이. 그게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그는 기뻐했다.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은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강릉작은도서관의 명예 관장을 맡게 되면서 작가는 다시 고향과 깊은 연을 맺기 시작했다. 소설 쓰기를 소망하는 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고 문학을 이야기했다. 수도권에 문인들이 몰려 있어 지방은 세 명 이상 모여야 결성할 수 있는 지부 문학협회조차 구성하기 힘들다는 것도 알았다. 그가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이 더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코로나 사태로 지금은 많은 것이 멈추어 있지만 작가는 앞으로 할 일을 헤아리며 강릉에서 시작할 미래를 기획하고 있다.
“징검다리 건너 어머니가 그네 타는 곳으로 향하던 길목에 아담한 작업실을 준비하고 있어요. 계획대로라면 이미 완성되었어야 하는데 올해 비가 너무 자주 내려서 마무리하지 못했어요. ‘거기서 나는 시 한 편이라도 쓰고 가련다’ 그게 나의 바람이에요. 시와 소설을 구분하는 경계를 없애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처럼 영역 없이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는 동네, 강릉을 그런 곳으로 만들고 싶어요.”

 

Contributing Editor 류진영
Photographer 송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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