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둘러싼 복잡한 이해관계와 맥락의 중심에 큐레이터가 있다.
예술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전문가가 말하는 큐레이터의 역할, 그들과 거장들과의 관계, 더 나아가 새로운 미술 시장의 흐름에 대한 솔직한 생각들까지 들어봤다.
공간과 공간, 그 사이 큐레이터
미술 동네에서 동분서주하며 미술 관련 책을 쓰고 전시를 기획해서인지 미술 분야에 대한 애정 어린 질문을 종종 받곤 한다. 특히 최근 몇 년간 작품 매매 현장에 등장한 2030세대의 예술적 관심도는 MZ세대의 직업 선택에도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다. 큐레이터 관련 질문을 바탕으로 몇 가지를 생각해보기로 한다. 내가 생각하는 예술이란 보이지 않는 0.2퍼센트의 초감각을 잡는 일이다. 이 초감각적 일들의 중심에서 좋은 전시회를 만드는 사람이 바로 큐레이터다. 먼저 큐레이터의 어원을 살펴봐야겠다. 예술 경영 공간에 대한 이해와 그 공간에서 어떤 역할과 책임을 부여받는지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큐레이터(Curator)’의 어원은 ‘완벽하게 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라틴어 ‘큐나드리아(Cunadria)’로 ‘과학적이며 기술적인 책임을 지닌 사람’을 뜻한다. 큐레이터는 본래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연구와 작품 보존, 전시 기획을 하는 학예사들을 칭하는 용어다. 고도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수행하는 업무에 따라 교육 담당은 에듀케이터(Educator), 소장품 보존 처리는 컨서베이터(Conservator), 총체적이고 방대한 전시회를 움직이고 관리하는 레지스트러(Registrar) 등으로 세분화된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보편적으로 상업 갤러리에서 일하는 사람들까지도 큐레이터라고로 부른다. 명확히 말하면 갤러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갤러리스트(Gallerist)’ 또는 ‘딜러(Dealer)’라고 해야 옳다.
비슷한 듯 확연히 다른 미술관, 박물관, 갤러리
대중의 눈에 미술관, 박물관, 갤러리의 분위기는 비슷해 보일 것이다. 하지만 각 공간이 지향하는 전시와 경영 목표는 매우 다르다. 미술관과 박물관은 대중을 대상으로 교육 목적의 공익성 전시를 기획해 선보인다. 갤러리는 일반 대중과 컬렉터를 대상으로 작품을 판매할 목적으로 수익성 전시를 기획해 선보인다. 나는 공공 전시장과 상업 전시장의 전시 기획을 아울러서인지 개인적 전시 기획 취향에 대해 질문받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수익성 전시보다는 공익성 전시 기획이 더 맞는 편이다. 감정적 치유와 지적 유희를 경험하게 하는 순수 미술이 좋아서 미술 현장을 선택했고, 처음 경험을 쌓을 때만 해도 국내에서 전시 공간 운영에 대한 정리된 정보를 접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선호하는 예술 경영과는 다른 공간에서 집중한 시간에 대해 약간의 아쉬움은 있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왜냐면 수익 지향의 전시장에 내 취향을 반영해 공익적 성격의 전시 기획과 아카데미를 운영하거나 공익적 전시 기획에 상업 갤러리의 경영을 융합해 문턱을 낮추는 작업도 진행했기 때문이다.
큐레이터의 전시 기획은 가치 있는 작품들과 관람객을 만나게 해주는 일이다. 따라서
미술관이든, 갤러리든 경영의 핵심은 좋은 작가를 발굴하는 것이다. 유명 작가 상당수는 천부적인 안목과 의지를 지닌 큐레이터에 의해 탄생했다. 작가의 역량만으로 위대한 작가가 된 것은 아니다. 인상파 화가들이 미술사의 한 페이지에 오르기까지는 폴 뒤랑뤼엘이 있었고, 피카소가 명성을 얻기까지는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역할이 컸다. 소박파 화가들 뒤에는 빌헬름 우데, 입체파 화가들에게는 칸바일러 갤러리가 있었다. 팝아트와 레오카스텔리 갤러리, 영국의 젊은 작가들(YBA)과 화이트큐브 갤러리, 제프 쿤스와 소나벤드 갤러리, 장 미셀 바스키아와 아니나노세이 갤러리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다. 여기에 언급한 예술가들은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만 무명시절 그들의 실험적 작품은 여러 사람에게 “이것도 작품인가?”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목있는 큐레이터들은 무명 작가의 작품에서 잠재력을 발견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폴 뒤랑뤼엘과 빌헬름 우데
1869년 미술 잡지 <취미와 예술>을 창간한 폴 뒤랑뤼엘은 르누아르, 피사로 등 당시 무명 작가들의 작품 세계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 미국에서도 인상주의를 알리기 위한 전시회를 열었으며 후에 미국에서 갤러리를 운영하기도 했다. 빌헬름 우데는 법률과 미술사를 공부한 뒤 미술 평론가 겸 화상으로 파리에 거주하며 1910년에 앙리 루소에 대한 최초의 전기를 쓰고 첫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또 피카소의 작품 ‘청색시대’와 브라크의 야수파 양식 그림을 처음 구입했으며, 베를린과 뉴욕에 입체파 작가들을 알리기 위한 전시회를 열었다. ≪비스마르크에서 피카소로≫를 출판하고 나서 독일 국적을 잃고 프랑스에서 숨어 지내기도 했다. 두 사례에서 알 수 있듯 큐레이터는 가능성 있는 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하기까지 지속적으로 미술사를 연구하고 동시대 작품들을 분석했을 뿐 아니라, 그 경험을 바탕으로 평론집을 집필했다. 또 화상 역할을 했지만, 잠재력 있는 예술가를 독점한 것이 아니라 해외에도 채널을 만들어 널리 알리기 위해 힘썼다. 큐레이터들이 작가를 통해 미래의 경제적 이익만 추구했다면 세계의 미술사는 지금처럼 풍부하지 못했을 것이다. 좋은 전시의 핵심은 잠재력과 가능성을 지닌 좋은 작가 발굴에 있다.
큐레이터들이 좋아하는 예술가와 작품들
큐레이터들의 예술적 취향은 두 가지 측면이 존재한다. 개인적 미적 취향과 직업적 미적 취향이다. 직업적 취향은 앞서 언급한 예술 경영 공간의 특성에 따를 수밖에 없다. 갤러리에서의 전시는 수익을 내는 것이 목표이고 큐레이터의 업무이기 때문에 대중에게 인지도가 높은, 이른바 유명 작가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 대중에게 인기 있는 소재와 주제의 작품을 선정하기도 한다. 물론 국내외 갤러리 모두 그런 운영을 하지는 않는다. 다수의 소신 있는 갤러리는 좋은 작가와 작품을 발굴하고 있다. 그러나 갤러리 대부분은 경영 시스템 면에서 ‘대중성’이 있는 작가와 작품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 반면 미술관은 인문·미술적인 교육적 전시가 공간 운영의 목표이자 큐레이터의 업무이기 때문에 대중과 함께 ‘인문 ·예술학적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작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갤러리와 미술관이 공통으로 원하고 좋아하는 작품은 ‘진정성’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작품의 진정성이 아닌 대중성이나 유명세는 임시적 성격의 ‘유사 권위’일 뿐,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을 수없이 목격했다. 좋은 작품이란 감상자에게 스토리텔링의 자리를 내어주는 작품이다.
관람객 속 ‘미린이’와 ‘컬린이’를 보며
요즘 작품 매매 현장에 등장한 20·30대 ‘미린이(미술+어린이)’ 혹은 ‘컬린이(컬렉터+어린이)의 미술품 ‘플렉스’가 떠들썩하다. 순수한 미술 애호가이든, 투자자든 젊은 바람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미술 현장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 큐레이터로서 컬렉터 입문자들에게 이슈인 새로운 미술품 거래 방식이 우려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먼저 고가 미술 작품을 다수가 소액 투자해 소유권을 지분 형태로 받는 방식이 그렇다. 실제 미술 작품은 해당 회사가 구입해 소장하며 지분 일부는 회사가, 그 외 지분은 개인들에게 나눠 판매한다. 마치 기업의 주식과 비슷한 판매 방식이다. 매도할 때는 소유권을 가진 개인들이 투표를 해서 판매 여부를 결정한다. 기존의 미술품 거래는 일반 서민이 구입하기에는 부담이 큰 돈이 들어가는 데에 비해서 적은 금액으로도 투자가 가능한 방법이니 경험 삼아 미술 작품의 소유권을 가져볼 색다른 기회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거래 방식은 아직 검증이 되지 않은 시작 단계다. 이 시대가 낳은 새롭고 생소한 거래 방식들은 아직은 검증되지 않았다. 새로운 미술 시장이 아니더라도, 미술품은 환금성이 낮아 개인적 취향의 미술품을 감상 목적이 아닌 재테크 목적으로 구매하는 것은 권장하지 않는 편이다.
나만의 작품, 이렇게 고른다
컬렉터 이전에 관람객으로서가 먼저다. 어떤 전시장이든 가까운 전시장부터 자주 방문하다 보면 가슴이 먼저 알아보는 작품을 만난다. 감상 팁을 나누자면, 우선 작품을 어떤 선입견이나 정보 없이 ‘보이는 그대로 보기’, 그다음 신뢰할 만한 정보를 통해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기’, 마지막 ‘나의 눈으로 보기’다. 예술 작품 감상에는 다층적 시각이 필요하다. 감상 시간이 쌓인 후에 확고한 미술적 취향으로 내 일상 공간의 인테리어 목적에 걸맞은 소장품을 수집하기를 권한다. 급변하는 시대, 큐레이터의 역할을 또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순수 관람객과 컬렉터 입문자를 모두 품에 안고 삶에 지친 그들에게 감정적 치유와 지적 유희를 경험하도록 0. 2퍼센트의 초감각적 작품들로 좋은 전시를 꾸려야만 한다. 큐레이터는 자긍심이 큰 직업이다. 그 자긍심은 스스로 직업적 윤리와 의무, 그리고 사명감의 무게를 견뎌내야만 가능한 것이다.
Writer 이일수(≪큐레이터는 무엇이 필요한가≫ 저자, 전시 총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