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슬레이트 지붕과 빛바랜 간판을 지나쳐 다다르는 바캉스데빠헝. 캐주얼 와인 바인 이곳에서는 가벼운 안주와 프랑스 와인,
시간이 지날수록 진가를 발휘하는 추억, 그리고 시간을 판다.
바캉스데빠헝 박유미
바캉스데빠헝에 들어서면 가본 적 없는 프랑스의 어느 해안 도시가 떠오른다. 말로 설명하지 못한채 우물쭈물하면 박유미 대표가 옆에서 거들 것이다. 그 느낌은 오래된 것도 새로워 보이고, 금방 만든 것도 빈티지하게 보이는 것이라고. 강릉에는 작은 프랑스가 곳곳에 있다. 프랑스 가정식을 만드는 ‘썸머키친’, 그 위에서 지속가능한 아름다움을 위한 소품들을 모아놓은 편집숍 ‘오프랑’, 그리고 ‘바캉스데빠헝’까지다. 모두 박유미 대표의 작품이다.
바캉스데빠헝이 프랑스어로 ‘부모님의 휴가’라고요. 이런 이름을 지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바캉스데빠헝은 프랑스 와인 문화를 강릉에서 소개하고 싶어 만든 캐주얼 와인 바예요. 우리나라에 와인 문화가 고급스럽게 전파된 느낌이 있는데, 실제 프랑스에서는 손님이 오면 차나 커피를 내오듯 와인을 마시는 것이 일상이에요. 바캉스데빠헝은 휴가를 보내러 간 부모님 집의 거실처럼 꾸미고 싶었어요. 오랜만에 가도 낯설지 않고 멀리 떨어져 살고 있어도 늘 마음으로는 함께인 집처럼요. 부모님은 휴가를 떠난 그집에서 고향 친구들과 만나 옛날이야기를 나누고 좋았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그런 디테일한 상황을 생각해서 인테리어를 했고 캐주얼한 음식과 와인으로 바를 채웠죠.
프랑스 가정식을 파는 ‘썸머키친’이라는 음식점도 운영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프랑스 문화와 가까워진 계기가 궁금해요.
저는 프랑스에서 유학을 하고 호텔에서 쭉 일을 해왔어요. 10년 정도 일면서 직장 생활에 대한 염증이 생기던 차에 미국 포틀랜드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됐어요. 포틀랜드는 인구의 70%가 농부라는 거예요. 무슨 말인가 자세히 들어보니 기본적으로 본인이 먹어야 하는 것들을 직접 농사짓고 산다는 거였어요. 그때 ‘저렇게 사는 게 진짜 사는 모습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포틀랜드로 가겠다고 결심하던 중에 강릉으로 여행을 와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됐죠. 그러면서 포틀랜드 대신 강릉으로의 이주를 택했어요.
강릉의 어떤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나요?
강릉은 문화적으로 꽉 차 있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자연이 가까이에 있다는 점이 제가 좋아하는 프랑스 파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누구나 그렇듯 처음에 왔을 때는 이상적으로만 느껴지더라고요. 살다 보니 처음 생각이 맞았죠. 강릉 사람들은 따뜻하면서 점잖고 도시 자체가 굉장히 깨끗하게 잘 관리되어 있어요.
대도시에서 생활을 하다 소도시로 오면서 생긴 삶의 변화도 분명 있을 것 같아요.
일단 결혼이라는 중대한 터닝 포인트도 있었지만 만나는 사람들과의 친밀감의 밀도인 것 같아요. 서울은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 대도시라 나와 통하는 사람을 만날 확률이 높을 뿐이지, 모든 사람들을 다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강릉에서는 다양하지는 않지만 나와 취향이 맞는 친구들을 밀도 있게 만날 수 있어요. 물론 처음 왔을 땐 좋아하는 취향의 공간이 없어서 참 아쉬웠지만 제가 직접 만들면서 해소됐어요. 오히려 그렇게 아쉬움을 채우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도시의 크기에 달린 문제라기보다는 제가 갈 수 있는 범위 안에 좋아하는 곳과 취향이 맞는 친구들이 있고, 그렇게 하루하루 살다 보면 오히려 부족함이 없어진다고요. 엄청난 시간을 들이지 않고서도 좋아하는 것들을 농밀하게 채울 수 있는 삶에 만족하고 있어요.
반대로 변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요.
처음 와서 프랑스 가정식 음식점을 오픈하다 보니 옷차림이나 행동 자체를 프로방스 느낌으로 해야만 할 것 같은 거예요. 호텔에서 일하던 저와는 아주 다른 삶을 그리게 됐어요. 또 아기를 가지며 아줌마가 되었고요. 그래서 상황과 책임에 맞는 사람으로 달라져야 한다는 부담과 걱정이 공존했죠.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면서도 나 자신을 잃지 않을까 걱정했고요. 그런데 환경이 달라져도 원래 나의 모습은 쉽게 변하지 않더라고요.
다양한 소품을 소개하는 편집숍 오프랑과 썸머키친, 바캉스데빠헝을 운영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세 공간은 카테고리가 다르지만 공간을 어우르는 지점은 프랑스로 같아요. 그래도 각각 다르게 깊어지면 좋겠어요. 모두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분명 동료들도 저와 취향이 비슷하기 때문에 의미 있고 재미있게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팀원들을 위해서라도 각각의 공간들이 고유의 색깔을 지니면서 깊어졌으면 해요.
강릉에서 자리 잡으면서 어려웠던 점도 있었겠죠.
현지인들이 우리를 낯설게 생각하는 것이 어려웠어요. 낯선 곳에 가면 당연히 외롭지만, 현지인이 선뜻 다가오기 어려울 만큼 우리의 장르가 생소했던 거예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예민해지기도 했어요. ‘내가 너무 이상하게 보이진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에요.(웃음) 그런데 강릉은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분들이 모여 살더라고요. 세월을 가늠할 수 없는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긴 가당치도 않잖아요. 그래서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보니 지금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제가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어요.
좋은 동네란 어떤 곳일까요?
여러 세대가 함께 어우러져 사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어릴 때부터 살아왔으며 삶을 영유할 수 있도록 일자리가 온전한, 나이가 들어서도 충분한 안정을 취할 수 있는 곳이 좋은 동네가 아닐까요. 사실 강릉이 그렇죠. 처음 바캉스데빠헝의 자리를 찾을 때 이곳 창문 너머로 가득 찬 오래된 대리석 건물을 먼저 발견했어요. 시선을 따라가다 보니 이 건물을 찾아냈고요. 매물도 아니었는데 두 달 동안 쫓아다니며 이 건물을 얻게 됐어요. 저는 세월이 켜켜이 쌓인 공간을 찾아다니는 것 같아요. 역사가 묻어 있는 곳이 주는 힘이 분명히 있잖아요.
인생의 종착지도 강릉일까요?
프랑스예요. 파리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서핑 포인트가 있는 해안 도시가 자리해요. 그곳에서 터를 잡고 서핑 숍을 운영하면서 파도가 없는 날에는 근처 와이너리 투어를 진행하고 싶어요. 더 나아가 제가 좋아하는 프랑스 와인들을 한국 수입사에 소개하는 작업도 하고 싶고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웃음)
강릉은 여성들의 문화적 파워가 뛰어난 도시예요. 대표적으로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이 있죠. 거리를 걸어도 문화적인 조예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어요.
그런 점은 프랑스 파리와 비슷한 것 같아요. 그래서 강릉이라는 도시에 제 삶을 던진 것일 수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