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된 메뉴를 소개하는 대신 변화무쌍한 제주의 날씨에 몸을 맡기듯 매 순간 그들의 속도, 방식대로 재료를 고르고 음식을 만든다. 여러 도시를 섭렵하며 식문화를 경험한 일도가공 멤버들은 다채로운 시선으로 제주의 식재료와 주방을 바라본다.
서울에서 시각디자이너로 활동한 대표 이기범과 덴마크에서 요리를 하던 셰프 설영찬은 제주 내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콘텐츠 회사에서 만났다. 회사는 게스트하우스, 식당 등 다양한 공간과 이벤트를 기획, 운영하며 빠르게 성장했지만 늘 자신의 작업을 꿈꿨던 두 사람은 회사를 나와 스리라차 소스처럼 가공된 식품, 향신료를 판매하는 브랜드를 만들고자 했다. “정부 지원 사업이 뜨는 3월에 시작하고 싶었어요. 예기치 않게 코로나19가 찾아왔고 우물쭈물하기보다 식당을 열어 저희 작업에 빨리 몰두하자고 결론이 났죠.” 지난해 9월 의기투합해 제주 식재료를 활용한 술집 일도가공을 오픈한 두사람은 이국적이거나 독창적인 레시피로 제주의 식재료를 요리한 음식을 내놓는다. 큐민과 파낭커리 등의 향신료를 더한 오징어숯불구이, 해산물을 넣은 얌운센 스타일의 요리 등이다. 언뜻 동남아 음식도 떠오른다. 식당 바로 앞에 있는 동문시장에서 맛볼 수 있는 딱새우회, 흑돼지바비큐와는 아예 다른 결의 실험적인 음식들이다.
손님이 좋아할 만한 것, 도민에게 익숙한 것은 일도가공이 아니어도 누군가가 해낼 일이다. 일도가공만이 할 수 있는 것을 고민한다.
“보통 제주에서 식당을 오픈하는 사람들은 제주스러움을 강조해요. 구이, 회처럼 향토적이거나 보편적인 음식을 팔면 저희가 금전적인 이득을 취할 수는 있겠지만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제주의 식문화는 굉장히 역동적이에요.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육지의 재료가 들어오기도 하지만 대부분 현지에서 모든 식재료를 조달해요. 망고, 패션프루츠가 자라는 동시에 국내에서 메밀 생산량이 가장 많죠. 이런 식재료 환경을 시장이 잘 활용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웠고,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컸어요.”
일도가공은 제주 특산, 향미 강렬을 지향한다. 파파야, 돼지고기, 딱새우처럼 동남아 국가에서 나는 식재료가 제주에 많은 터라 일도가공의 메뉴는 자연히 동남아 음식과 닮았다. 이렇게 낯선 음식을 판매하는, 일도가공의 메뉴가 지난 2월부터는 매일매일 바뀐다. 불편을 토로하는 손님도 없지 않지만 이 또한 제주의 식재료 환경을 반영한 결과다.
“이전 회사에서 멜튀김과 맥주를 결합한 식당 멜맥집을 기획, 운영했어요. 그때 제주 식재료의 사이클, 식문화에 대해 뼈저리게 배웠어요. 멜튀김을 판매하는데 멜 수급이 어려운 날이 많았거든요. 일도가공도 오픈 초기에는 고정 메뉴를 판매했다가 매일 메뉴를 바꾸는 콘셉트로 바꾸었죠. 제주는 재료는 다양하지만 양이 한정적이에요. 수산물의 경우 날씨에 따라 조업이 어려울 수도, 조업량이 확연히 줄어들 수도 있어요. 식재료의 주기는 더 민감하고요. 예를 들면 멸치 중에서도 꼼멜 같은 경우는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그 잠깐만 잡혀요. 고사리도 얼음이 녹기 시작하는 초봄에 꺾기 시작해 뱀이 나오면 안 꺾죠. 그런데 그게 오히려 장점이라고 생각했어요. 저희 상상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으니 매일 동문시장에서 장을 봐 재료를 바꿔가면서 요리를 한 거죠.”
메뉴 중에는 맛과 인기를 모두 얻어 꽤 오래 판매되는 것도 있고 하루 만에 없어지는 것, 테스트만 해보고 올리지도 못한 메뉴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이 일도가공을 성장시켰다. 최근에는 일도가공의 문을 한 달여간 닫고 재정비를 하는 한편, 제주시청 앞에 쌀국숫집 세븐시티홀누들스테이션을 오픈했다. 일도가공과 함께 낮에 운영하는 밥집을 열고 싶었던 두 사람은 쌀국수 단일 메뉴로 의견을 좁혔다. 일도가공과는 완전 다른 플레이의 식당. 처음에는 소고기를 왕창 넣어 대충 맛있게 끓여보자 했지만 그들의 탐구 습관이 다시금 발동했다.
“보통 베트남 쌀국수를 떠올리는데, 쌀국수도 중국, 홍콩, 베트남 각 지역에 따라 맛과 재료가 엄청 다양해요. 미분당처럼 한국식 쌀국수도 인기고요. 그래도 그간 우리가 해온 게 있는데 아무렇게나 할 순 없었어요. 돼지고기를 넣고 제주식 쌀국수를 만들게 됐죠. 쌀국수를 만들기 위해 라멘을 연구했어요. 하하. 나가사키 짬뽕이 화교 셰프가 중국인 유학생을 위해서 돈코츠 라멘과 지역의 식재료를 섞어서 만든 거잖아요. 그와 유사해요.”
맑지만 깊은 맛의 육수가 일품인 쌀국수에 제철 채소와 나물로 만든 곁들임 반찬, 제주 전통 음식인 괴기반을 사이드 메뉴로 구성했다. 괴기반은 잔치가 많은 제주의 특색이 담긴 음식으로 괴기는 고기, 반은 1인분을 뜻하는 방언이다. 수육, 순대, 두부를 조금씩 담고 여기에 겉절이나 젓갈 소스처럼 포인트로 곁들일 것을 더한다. 동남아나 홍콩의 조식 식당을 연상시키는 인테리어도 음식의 맛을 배가한다. 제주시청 앞 여느 식당과는 다른 모양새다.
“이 동네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여기에 왔다는 걸 알리고 싶었어요. 제주에 이주하면 괸당 문화(친척을 뜻하는 방언으로 혈연, 학연, 지연으로 묶인 사람들이 친척처럼 지내는 것)에 익숙해지고 동화되려 하죠. 저는 그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은 그만의 바이브를 내뿜으며 살아야죠. 제주에서 차리는 가게 이름은 두 글자에서 네 글자 사이로 끝나요. 살레, 엉물처럼 귀엽고 정갈한 느낌의 방언이죠. 그걸 깨고 싶었어요. 제가 서울에서 대림동에 살았는데, 신대방까지는 서울이지만 대림역으로 가면 갑자기 중국이 되잖아요. 그것처럼 식당 문을 열고 들어오면 제주의 식재료로 최고의 맛을 내지만 우리의 공간, 타지에 당신이 입장했다는 걸 최대한 알리고 싶었어요.”
일도가공은 한 달간의 휴식기를 끝내고 이제 곧 오픈한다. 매일 달라지는 메뉴와 가게 사정은 인스타그램(@ildogagong)에서 확인할 수 있다.
외우기도 어려운 세븐시티홀누들스테이션이라는 이름에도 이러한 생각이 녹아 있다. 일도가공이 있는 칠성로가 외지고 멀어서 처음엔 주위 사람들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오픈 초기에 홍보가 안 돼 어려웠던 것도 사실. 그런 변두리에서 시청이라는 메인 스트리트까지 왔다는 뿌듯함에 이국적인 문화까지 함께 담았다. “설 셰프가 토론토에도 살았는데 그때 차이나타운에서 갔던 쌀국숫집, 식당 사진을 보여줬어요. 이름이 엄청 길더라고요. 마치 조셉네 아들 크리스의 레스토랑처럼요. 아시아에서 힘겹게 배 타고 와서 정착한 이주민 가족의 역사가 담겨 있죠. 좀 촌스럽지만 그만의 프라이드를 보여주는 거잖아요. 악착같이 살아남겠다는 의지도 있고요. 그런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스리라차 소스로 시작한 그들의 세계관이 마블 유니버스처럼 일도가공, 세븐시티홀누들스테이션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아직 그 세계는 걸음마를 뗐을 뿐이다. 일도가공이 개발한 가공식품에 브랜드 이름을 달아 온오프라인으로 파는 게 그들의 첫 목표다. 올해 댕유지를 활용한 핫소스 아이템으로 로컬 크리에이터 지원 사업에 당선되면서 목표에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저희 제품으로만 이뤄진 편의점을 만들고 싶어요. 셰프가 자신이 개발한 아이템들로 매대를 가득 채워보고 싶다고 이야기했는데, 저도 그게 우리의 가장 큰 비전이라 생각해요.”
그들은 일본의 후리카게처럼 제주의 감칠맛 나는 식재료로 시즈닝을 만들거나 고형 커리, 통조림 등을 계획 중이다. 물론 그 제품은 수일 또는 좀 더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일도가공의 멤버들은 조급하지 않다.
“요새 브랜드는 완성된 상품이 아닌 과정의 연속을 보여줘요. 우당탕탕 잡음이 많은 제품 개발, 제작 과정에서의 시행착오, 출시 이후의 지지부진한 반응 등 늘 과정 속에 있죠. 그게 자연스러운 것 같아요. 어떻게 매번 완벽한 결과만 내놓겠어요. 저희는 불완전한 사람이고, 환경이나 변수에 영향을 끊임없이 받아요. 다만 그 과정을 진솔하고 대중이 납득할 수 있는 방법, 콘텐츠로 풀어낸다면 그 또한 브랜드의 좋은 요소라 생각해요. 이게 요즘 팬을 양성하는 방법 중 하나고요. 더 유연한 태도로 움직여야 해요. 왜 실패했는지를 명확히 규명한다면 실패 또한 성과니까요. 멜맥집과 일도가공 오픈 초기가 저희에게는 완전한 성공의 실패였어요. 제주에서는 매일 똑같은 식재료를 수급하기가 쉽지 않다는 걸 배웠으니까요.”
Contributing Editor 유승현
Photographer 박나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