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윤지는 온전히 자기 자신이었던 오늘 하루가 더없이 각별하다고 말했다.
촬영 내내 어딘가 들떠 보였어요.
대개 대기실에서부터 촬영장 분위기가 조금은 점쳐지는데, 오늘은 시작부터 느낌이 좋았어요. 그동안 크게 의식하지 못한 사이 어느샌가 스스로 한계를 짓고 그 안에 나를 가두고 있었나 봐요. 맞아, 나한테 이런 모습도 있었지? 하면서 순간순간 드러나는 내 모습에 반갑고 기뻤달까. 이 결과물을 다른 사람들이 잘 봐준다면 좋겠지만, 사람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제게는 오늘이 어떤 스위치를 다시 켠 날로 기억될 것 같아요. 너무 거창한가.(웃음) 하지만 진짜 지금 내 기분이 그래요.
방금 말한 스위치는 ‘배우 이윤지’로서의 스위치를 말하나요?
아이를 낳고도 일을 꾸준히 했고 항상 배우 이윤지로 임했죠. 하지만 늘 ‘엄마’라는 역할이 어느 정도 부여됐던 것 같아요. 실제로 아이와 함께하는 경우가 많았고, 혼자 촬영장에 가더라도 ‘두 아이 엄마’라는 인식을 무의식중에 계속 하게 된다거나 하는. 그런데 오늘은 엄마로서의 정체성에서 완전히 분리된 느낌이었어요. 저도 천천히 곱씹어보면서 이게 어떤 감정인지 찾아봐야겠어요.
꽤 오랫동안 짧은 헤어스타일을 고수 중이죠.
짧은 헤어는 애써 표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발산되는 힘이 있는데, 그게 좋아요. 머리가 길었을 때 나오는 내 모습보다 짧았을 때 나오는 모습이 더 마음에 들기도 하고요. 못해도 한 달에 한 번은 미용실에 가서 커트를 하는데, 요만큼 잘라낼 때마다 그만큼의 시간도 함께 잘라내는 것 같아서 묘한 쾌감이 있어요.
과거, 현재, 미래 중 어느 쪽에 치우치는 유형인가요?
아마 제 성격을 한 단어로 정의하면 ‘뒤끝’이나 ‘미련’ 뭐 이런 말들일 거예요.(웃음) 어릴 때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해서 언뜻 보기에는 앞으로 잘 해쳐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뒤를 보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머리를 잘라내면서 지나간 시간을 좀 끊어내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어요. 더 이상 자를 머리가 없으면 숱이라도 쳐내고 와야 직성이 풀리더라고요.
주로 어떤 일에 미련을 갖게 되던가요?
많은 일에 연연하는 편이에요. 제가 한 실수에서 빨리 헤어 나오지 못하는 편이기도 하고요. 관계도 마찬가지고. 아주 찰나의 짧은 순간을 붙들고 쉽게 놓지를 못해요. ‘그녀의 목소리가 왜 그랬지?’ ‘그 사람 컨디션이 안 좋았나?’ ‘난 왜 그때 그렇게 말했지?’ 이런 생각들…. 누구나 하는 생각이지만, 이런 잔상이 꽤 오래 남아요. 어떤 때는
그 일들이 실제로 나에게 남아 있는 건지, 아니면 내가 붙들고 놓지 않는 건지 헷갈릴 때도 있어요.
그 와중에 오지랖도 넓어서 온종일 생각투성이랍니다. 아주 피곤한 성격이죠.(웃음)
스스로 피곤하다고 말하면서 표정은 전혀 개의치 않는 느낌이에요.
그냥 나의 모습을 받아들인 거예요. 여기에 비관적이기까지 하면 진짜 최악이었을 텐데, 다행히 그렇지는 않아요. 또 일에서는 이런 성격이 나름 장점이 되기도 해요. ‘됐어, 잊어버려’ 하고 마는 성격이 아니다 보니 어떤 상황이나 인물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드는 습관이 연기할 때 도움이 되더라고요. 난관에 봉착한 건 결혼 후였죠. 뒤끝을 잘 해결하지 못하면 나뿐만 아니라 상대도 힘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난 뒤 집에서는 가끔 ‘다른 캐릭터를 연기한다’고 스스로 생각할 때도 있어요.(웃음)
한두 달 운동을 못할 때도 늘 염두에 두고 있는 거예요. 바쁘다고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과
‘시간이 되면 운동하러 가야지’ 하고 생각하는 건 엄연히 다르니까요. 그게 결국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되더라고요.
결과적으로 허투루 보내는 시간이 거의 없군요.
때로는 시간이든 일이든 대충 흘려보내는 요령도 필요한데, 그게 아직은 잘 안 되네요. 뭐든 약간 전투적으로 임하는 편이라서요. 그렇다고 모든 걸 완벽하게 해낸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고요. 대표적인 게 육아예요. 어쩔 수 없이 타협하고 포기하게 되는 것들이 생기더라고요. 둘째 소울이가 태어나고 나서는 더 그렇고요. 누가 “둘째는 그래도 좀 수월하죠?” 물으면, “여전히 육아에 적응하지 못하는 저에게 적응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요.(웃음) 아이를 돌보는 간단한 스킬들은 늘었지만, 엄마로서 해야 하는 선택들 또는 아이를 대하는 순간순간의 태도는 여전히 미숙할 때가 많아요. 육아는 한 사람을 성숙한 인간으로 독립시키는 일인데, 아마도 영영 숙달하기 어렵지 않을까요? 심지어 나이 들면서 변하는 내 생각과 감정을 받아들이기도 아직 벅찰 때가 있는걸요.
소울이가 태어나고 엄마로서의 세계관이 한층 더 확장된 느낌이에요.
자식은 나와는 완전히 분리된 타인이라는 사실을 더욱 실감하고 있고, 동시에 아이에게 의지하는 마음도 생겼어요. 특히 라니가 일곱 살이 되면서 엄마가 하는 일을 조금씩 인지하기 시작했거든요. 배우 활동을 할 때 라니가 좋은 동반자가 되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요즘 들어요. 소울이는 어느 정도는 흘러가는 대로 두어도 괜찮다는 걸 직간접적으로 알려주고 있고요. 둘째라서 소홀해졌다기보다는 그로 인해 나에게는 또 다른 부분에서 여유가 생긴 셈이니 그 에너지를 소울이에게 잘 전달해주면 된다고 생각해요.
영화 <드림팰리스> 촬영을 시작했다고 들었는데 오랜만의 촬영장은 어땠나요.
각자 현실의 아픔을 안고 신도시의 신축 아파트 ‘드림팰리스’에 입주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예요. 상대 배우로는 김선영 배우님이 출연해요. 저 사람이 연기하는 캐릭터는 어떤 모습일까, 이런 궁금증을 일으키는 흔치 않은 배우잖아요. 선배님의 연기를 보면서 막연히 ‘나도 저런 배우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돼요. 현장에서 그런 배우와 함께 연기한다는 건 정말 행운이죠.
하루쯤 오롯이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글쎄, 워킹맘 입장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상상이야 늘 하지만, 그렇다고 막상 혼자 있어도 크게 즐거울 것 같지는 않아요. 아직 준비가 덜 됐나봐요. 굳이 따로 시간을 내기 보다는 바쁜 일상 속에서도 나에게 행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을 소소하게 잘 챙기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모닝커피나 필라테스처럼 별거 아니지만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들요. 육아에 치이고 작품까지 하다 보면 한두 달 운동을 못할 때도 있어요. 그럴 때도 늘 운동을 염두에 두는 거예요. 바쁘다고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과 ‘시간이 되면 필라테스 하러 가야지’ 하고 생각하는 건 엄연히 다르니까요. 항상 마음 한편에 나를 잊지 않고 두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럼 작지만 소중한 것들이 생기고, 그게 결국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되더라고요.